문화

3,400년 전 히타이트 점토판 184개가 기록한 역병, 죽은 공주, 전쟁의 절규

AI 생성 이미지 - 튀르키예 카얄르피나르 발굴지의 갈색 점토판들과 고고학자의 도구들이 배치된 발굴 트렌치
AI 생성 이미지 - 카얄르피나르 히타이트 점토판 발굴 현장

한줄 요약

카얄르피나르 히타이트 점토판 184개는 기원전 14세기 중반, 투달리야 2세 재위기에 아나톨리아를 뒤흔든 역병과 전쟁의 기록을 3,400년 만에 세상에 드러냈다. 고열을 동반한 전염병이 도시에서 도시로 퍼지며 아이와 영아가 쓰러지는 상황에서, 왕실은 점술사를 불러 아픈 왕자와 공주의 생존 가능성을 물었다. 아직 젖을 떼지 못한 공주의 병과 죽음, 장례 의례까지 기록된 점토판은 왕실의 사적 비극이 국가 문서로 남겨진 드문 사례다. 서부 아나톨리아의 장군들은 적의 포위 속에서 병사, 말, 전차를 요청하는 서신을 왕에게 보냈으며, 예비 판독에 따르면 지원이 없을 경우 군대가 소멸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는 이 아카이브를 21세기에 발굴된 가장 포괄적인 히타이트어 아카이브라고 밝혔으며, 2025년 출토 53점과 같은 구역·같은 아카이브에서 연속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연구진은 더 넓은 왕실 문서고의 일부로 보고 있다. 히타이트어와 후리어로 작성된 이 문서들은 3,400년 전 국가 행정, 군사 동향, 종교 의례, 왕실 가족의 위기를 직접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수도 하투샤 중심이었던 히타이트 연구에 지방의 시각을 더할 수 있는 자료라고 나는 판단한다.

핵심 포인트

1

184개 점토판의 구성과 발견 경위

카얄르피나르에서 2025년과 2026년 두 시즌에 걸쳐 발견된 점토판과 파편 총 184개는 기원전 14세기 중반 투달리야 2세 재위기의 왕실 아카이브로 확인되었다. 2026년 시즌에만 131개가 출토되었고, 2025년에 같은 구역에서 발견된 53개와 합산한 수치다. 히타이트어와 후리어 두 가지 언어로 작성된 이 문서들은 편지, 기도문, 의례 기록, 점복 일지 등 다양한 형식을 포함하며, 코치 대학교의 츠이뎀 마네르 부교수가 2021년부터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 유적 조사 자체는 2005년에 시작되었으므로 20년이 넘는 장기 프로젝트의 결실인 셈이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장관 에르소이는 이것을 "21세기에 발굴된 가장 포괄적인 히타이트어 아카이브"라고 밝혔는데, 하투샤(약 25,000점, 1906년 이후)와 사피누와(약 5,000점, 1990년 이후)가 모두 20세기 발굴물이라는 점에서 시간적 범위를 한정한 평가다. 184개라는 숫자에는 완형 점토판뿐 아니라 파편도 포함되어 있어, 실제 판독 가능한 완전한 텍스트의 수는 이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2

역병 기록 — 3,400년 전 전염병의 흔적

점토판의 예비 판독 결과, 고열을 동반한 전염병이 도시에서 도시로 퍼지며 특히 아이와 영아가 많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튀르키예어 원어 보도에서는 "고열성 전염병(yüksek ateşli salgın)"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영어 보도의 "high-fever epidemic"과 정확히 대응된다. 이 역병 기록은 히타이트의 더 유명한 전염병 사건, 즉 슈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이집트 원정 후 시작되어 무르실리 2세의 역병 기도문으로 유명한 대역병과는 시기가 다른, 약 50년에서 100년 앞선 사건이다. 왕실이 역병에 대응해 점술사를 불러 아픈 왕자와 공주의 운명을 물어본 것은, 당시의 인식 체계 안에서 최선의 전문가 자문을 구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고위 관료들도 자신의 자녀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문의했다는 기록은, 역병의 공포가 왕실에만 한정되지 않고 지배 계층 전체에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4세기 아나톨리아의 공중보건 상황과 교역망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자료다.

3

유아 공주의 죽음 — 국가 기록에 남겨진 왕실의 비극

가장 극적인 기록은 아직 젖을 먹던 공주에 관한 것이다. 한 점토판에는 이 공주가 병에 걸렸다는 우려와 함께 운명을 예측하려는 시도가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점토판에는 그 공주의 죽음과 장례 의례가 담겨 있다. 이미 2025년 시즌에도 왕실 구성원과 어린 공주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 바 있어, 이 주제는 여러 시즌에 걸쳐 누적된 기록임이 확인된다. 왕실 혈통의 유지가 국가 존속과 직결되던 시대에 아이의 생사는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핵심 변수였다. 아이의 병과 죽음이 공식 기록에 남겨진 것은 냉정한 통치 논리와 부모의 절박함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주며, 이런 종류의 기록이 3,400년을 버텨낸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개인의 비극이 국가의 공식 아카이브에 편입되는 과정은 고대 왕정의 작동 방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공주의 건강 상태가 점복이라는 공식 절차를 통해 예측되었다는 점은, 왕실 자녀의 생존이 단순히 가정적 관심사가 아니라 국가 의례와 행정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다. 이런 기록은 다른 고대 근동 왕국에서도 드물어, 비교 연구의 가치가 매우 높다.

4

장군들의 군사 서신 — 위기의 최전선에서 온 편지

서부 아나톨리아에 주둔한 장군들이 적의 포위 상황에서 병사, 말, 전차를 요청한 편지의 발견은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의 군사적 위기를 직접 보여주는 1차 사료다. 예비 판독에 따르면 지원이 도달하지 않으면 군대가 소멸할 수 있다는 경고가 이 서신에 담겨 있었다. 일부 영어권 보도는 장군들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취지의 내용도 있다고 전했으나, 튀르키예어 원어 보도에서는 이 표현이 확인되지 않으며 "평가되는(değerlendirilen)"이라는 유보적 표현이 사용되어 확정 해독이 아닌 예비 해석임이 명확하다. 이 서신이 하투샤가 아닌 사무하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사무하가 당시 군사 통신의 허브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최전선의 장군이 중앙에 상황을 문서로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체계는, 기원전 14세기에 이미 조직적인 군사 행정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이 서신은 히타이트 제국의 "생존 전쟁" 시기에 대한 기존 이해를 보완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지금까지 주로 후대 기록에 의존해왔던 이 시기의 군사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증언하는 동시대 문서라는 점에서 대체 불가능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5

새점술 일지 — 히타이트 의사결정 체계의 과정 기록

점술사들이 어떤 도시를 방문했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으며, 어떤 새를 관찰했는지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점토판의 발견은 히타이트 점복 연구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히타이트 점복 텍스트 코퍼스에 따르면, 히타이트의 새점술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정해진 구역에서 관찰하는 체계적인 방식이었으며, 결과를 확인하거나 배제하는 이분법적 판정 체계를 사용했다. 통상 점술 결과는 기록되어도 점술 과정 자체가 이렇게 세밀하게 기록된 사례는 드물기 때문에, 이 자료는 히타이트 왕실이 국가적 결정을 내릴 때 어떤 절차를 밟았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점술사의 이동 경로와 방문 도시 기록은 기원전 14세기 아나톨리아의 교통망과 행정 네트워크에 대한 간접 정보도 제공한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의 기록이 아니라 당시의 정보 수집과 분석 체계, 일종의 의사결정 감사 추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현대 기업의 의사결정 기록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를 가진 셈이며, 3,400년 전의 행정 체계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서화 문화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긍정·부정 분석

긍정적 측면

  • 하투샤 편향을 깨는 지방 행정 기록

    히타이트학은 지금까지 수도 하투샤에서 출토된 약 25,000점의 점토판에 크게 의존해왔으며,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시각이 연구의 기본 프레임이 되어왔다. 사무하에서 발견된 184개 점토판은 지방 행정 중심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편향을 교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 통신, 지방의 종교 의례, 지방 행정관의 역할 등을 수도의 기록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히타이트어와 후리어가 함께 사용된 점은 사무하 지역의 다언어 환경과 제국의 다민족적 성격을 직접 증거하며, 이는 교과서에서 다루는 히타이트의 이미지를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이런 지방 아카이브의 발견이 히타이트 연구의 패러다임을 수도 중심에서 네트워크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사무하의 기록이 하투샤의 기록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비교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히타이트 국가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한 단계 깊어질 것이다.

  • 고대 전염병사 연구의 새로운 1차 자료

    기원전 14세기의 전염병 기록은 전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며, 카얄르피나르 점토판의 역병 기록은 고대 의학사와 전염병 확산 연구에 새로운 1차 자료를 제공한다. 고열을 동반한 질병이 도시에서 도시로 전파되었다는 기술은 당시 아나톨리아의 교통망, 인구 이동 패턴, 도시 간 접촉 빈도에 대한 간접 정보를 담고 있다. 이 기록이 무르실리 2세의 역병 기도문(약 50년에서 100년 후대)과 시기가 다르다는 점은, 히타이트 제국이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전염병을 겪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역병 앞에서 점술이라는 형식으로 전문가 자문을 구한 기록은, 인간 사회가 팬데믹에 대응하는 방식의 구조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고대 전염병 연구자들에게는 기존에 접근할 수 없었던 시기와 지역의 데이터가 새로 열린 셈이며, 질병의 도시 간 전파 패턴은 당시 아나톨리아의 교역 네트워크 연구에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 히타이트 점복 체계에 대한 과정 기록의 발견

    히타이트 점복 연구에서 점술 결과만 기록된 자료는 다수 존재하지만, 점술 과정 자체가 세밀하게 기록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카얄르피나르에서 발견된 새점술 일지는 점술사의 이동 경로, 방문 도시, 관찰한 새의 종류와 행동까지 기록한 것으로, 히타이트 왕실의 의사결정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이 자료가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히타이트 점복 텍스트 코퍼스 같은 기존 학술 데이터베이스에 통합되면, 다른 유적에서 나온 점복 기록과의 체계적 비교가 가능해진다. 점술사의 이동 일지는 기원전 14세기 아나톨리아의 교통 네트워크와 행정 구역에 대한 정보도 간접적으로 제공하므로, 순수한 종교 연구를 넘어 역사 지리학적 가치도 지닌다. 나는 이 자료가 히타이트 사회에서 점술이 차지했던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튀르키예 고고학 인프라 확장의 구체적 성과

    카얄르피나르의 발견은 튀르키예 정부가 최근 몇 년간 추진해온 고고학 인프라 확장의 구체적 성과이기도 하다. 발굴 예산이 2019년 3,730만 TL에서 2023년 11억 TL로 대폭 늘었고, 연간 발굴 프로젝트 수도 2023년 기준 720개였으며 2026년까지 800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제도적이고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카얄르피나르처럼 2005년부터 20년 넘게 이어지는 장기 프로젝트가 유지될 수 있었다. 2025년 박물관과 유적지 방문객 3,480만 명과 73억 TL 이상의 수입은, 고고학이 순수 학술을 넘어 문화 관광 자원으로 기능하는 선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코치 대학교라는 사립 기관이 발굴을 주도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협력 모델은 다른 유적에도 적용 가능한 좋은 사례로 남을 수 있으며, 학술 기관의 독립성과 정부의 재정 지원이 결합된 이 구조가 장기 발굴의 핵심 성공 요인이라고 나는 본다.

우려되는 측면

  • 독립적 학술 검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21세기 최대 히타이트 아카이브"라는 평가는 발굴팀과 튀르키예 문화관광부의 자체 평가이며, 독립적인 학술 기관이나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에 의해 검증된 것이 아니다. 2025년 시즌 보고서가 학술지 아나톨리아 안티쿠아에 제출되어 채택된 상태이긴 하지만, 2026년 시즌 131점에 대한 학술 출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예비 판독 결과가 언론을 통해 먼저 공개된 상황에서, 이것이 정식 학술 출판 전에 과도하게 해석되거나 확대될 위험이 있다. 특히 장군 편지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표현처럼, 영어 보도에만 있고 원어 보도에서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 사실처럼 퍼지는 사례가 이미 발생했다. 학술 출판 전까지는 현재 공개된 모든 내용을 예비적 성격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향후 학술 검증 과정에서 해석이 수정되거나 새로운 맥락이 추가될 가능성을 반드시 열어두어야 한다.

  • 출판 지체의 현실적 위험

    사피누와의 사례는 출판 지체의 현실적 위험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약 5,000점의 점토판이 나왔지만, 2014년 기준 전체가 미출판 상태였고 영어로 나온 것은 실용 어휘 목록과 일부 텍스트에 한정되었다. 발굴 시작 이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전체 아카이브가 학술적으로 공개되지 못한 셈인데, 카얄르피나르 184점이 같은 경로를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히타이트어와 후리어에 능통한 전문가 수가 전 세계적으로 제한적이라는 현실적 제약도 출판 속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출판이 지체되는 동안 언론에 보도된 극적인 내용이 학술적 맥락 없이 대중에게 소비되면, 정확한 이해보다는 감성적 반응이 앞서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미 예비 판독 단계의 내용이 확정 사실처럼 소셜 미디어에서 유통되고 있어, 학술 출판의 속도가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왜곡된 정보가 고착될 위험이 현실적이다.

  • 고고학 성과의 정치적 활용 가능성

    장관이 직접 발굴 성과를 발표하고 "고고학의 황금 시대"를 선언하는 것은, 학술적 성과가 국가 홍보와 문화 정책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정치적 관심이 발굴 예산 확보와 유적 보존으로 이어지는 긍정적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정치적 내러티브가 학술적 해석을 앞지르면, 발굴 성과가 과장되거나 특정 방향으로 편향될 위험이 생긴다. 카얄르피나르 발굴이 코치 대학교라는 사립 기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어 일정 수준의 학술적 독립성이 확보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국가 발표와 학술 출판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장기적으로 학술적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좋은 고고학은 좋은 내러티브와 양립 가능하지만, 내러티브가 고고학을 앞서면 문제가 된다. 특히 발굴 성과의 의미가 학술 논문보다 정치 연설에서 먼저 규정되는 상황은, 장기적으로 학술 커뮤니티의 신뢰를 약화시킬 수 있다.

  • 유적 보존과 관광 개발 사이의 긴장

    카얄르피나르의 발견이 주목받을수록, 이 유적을 둘러싼 관광 개발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 2025년 튀르키예 박물관과 유적 방문객이 3,480만 명에 달했다는 통계는 고고학 유적의 관광 잠재력을 보여주지만, 발굴이 진행 중인 현장에 관광 인프라가 들어서면 고고학적 맥락이 훼손될 위험도 있다. 하투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보호받는 것과 달리, 카얄르피나르는 아직 그런 국제적 보호 체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발굴과 보존, 그리고 접근성 확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향후 이 유적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변수다. 나는 학술 발굴의 완전성을 우선하되, 장기적으로는 대중이 이 유적의 의미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아직 발굴이 진행 중인 현 단계에서는 현장 보존이 최우선이며, 관광은 학술 조사가 충분히 진행된 이후에야 논의될 수 있는 문제다. 하투샤처럼 유네스코 보호 체계 안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선제적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전망

학술 출판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할 사실은 이미 확인된 출판 진행 속도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다니엘 슈베머 교수와 세브귈 칠링기르 체수르가 공동 작성한 2025년 카얄르피나르 발굴 출토 히타이트 텍스트 보고서가 마네르 외 'Kayalıpınar–Samuha 2025 예비 보고서'(Anatolia Antiqua 34, 2026)에 수록되도록 제출되어 이미 채택된 상태다. 발굴 시즌이 끝난 이듬해에 예비 보고서 채택까지 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 팀의 작업 속도를 보여준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예비 보고서는 발굴 경과와 주요 발견물을 개괄하는 수준이며, 개별 점토판의 번역과 해석이 담긴 본격적인 학술 출판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2026년 시즌에 출토된 131점에 대한 예비 보고서의 채택 시점은 아직 알 수 없으며, 각 점토판의 상세 해독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전문 인력을 요구할 것이다. 히타이트어와 후리어 두 가지 언어로 작성된 점토판들의 해독은 해당 언어에 능통한 소수의 전문가에게 달려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히타이트어 전문가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현실적 제약도 출판 속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예비 판독에 기반한 것이므로, 정식 학술 출판 과정에서 수정되거나 보완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카얄르피나르 현장에서의 발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2025년과 2026년 두 시즌 연속으로 같은 구역에서 대량의 점토판이 나왔다는 것은, 이 아카이브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무하 유적은 여러 건물 터와 신전 추정 구조물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네르 부교수 팀이 이미 2023년에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 2채를 확인한 바 있다. 마네르 부교수는 당시 "건물의 평면도와 출토 유물을 볼 때 신전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고, 건물 중 하나에서는 하투실리 3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 용기까지 발견되었다. 이는 카얄르피나르 유적이 투달리야 2세 시대뿐 아니라 기원전 13세기 하투실리 3세 시대까지 걸쳐 있는 복층 유적임을 보여준다. 튀르키예 정부가 고고학 발굴 예산을 2019년 3,730만 TL에서 2023년 11억 TL로 대폭 늘린 기조를 감안하면, 카얄르피나르 발굴이 향후 시즌에도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 발굴 시즌에서 추가 점토판이 나올지 여부가 이 아카이브의 학술적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만약 신전 구역으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의례 텍스트나 왕실 의식 기록이 추가로 발굴된다면, 사무하가 종교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가 더 명확해질 것이다.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 신학과 의례의 지방적 변이를 추적하는 연구에도 결정적인 자료가 생기는 셈이다.

좀 더 먼 시야를 잡으면, 앞으로 1년에서 2년 사이에 본격적인 학술 분석이 진행되면서 히타이트학의 지형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 히타이트의 "생존 전쟁" 시기, 즉 사방에서 침공을 받아 수도를 포기한 위기의 시대에 대한 이해는 주로 하투샤에서 나온 후대 기록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사무하에서 나온 동시대 기록은 그 위기를 현장에서 직접 기록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른 자료다. 장군들의 서신은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 통신 체계를 보여주고, 역병 기록은 위기의 다층적 성격을 드러내며, 점복 기록은 왕실의 의사결정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특히 사무하와 사피누와의 비교 연구가 흥미로울 것이라고 본다. 사피누와에서도 약 5,000점의 투달리야 시대 기록이 나왔고, 두 지방 도시의 아카이브를 하투샤의 기록과 삼각 대조하면 기원전 14세기 아나톨리아의 훨씬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이것은 히타이트학이 수도 중심의 단일 시점에서 다원적 시점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두 유적이 같은 투달리야 2세 시기의 기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 연구의 가치는 더욱 크다. 사무하에서는 장군들의 지원 요청 편지와 새 점술 기록이, 사피누와에서는 그와 다른 구성의 문서들이 나왔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 두 도시의 문서고를 나란히 놓으면 히타이트 제국이 지방 거점마다 어떤 일을 맡겼는지 가늠할 새로운 단서가 나올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디지털 인문학의 관점에서도 기대할 만한 변화가 있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이 운영하는 히타이트 점복 텍스트 코퍼스 같은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미 히타이트 텍스트의 체계적 비교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카얄르피나르의 새점술 일지가 이 코퍼스에 통합되면, 기존에 알려진 히타이트 점복 의례와의 정밀한 비교가 가능해진다. 특히 점술 과정 자체가 기록된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자료는 히타이트 종교 의례 연구에서 중요한 참조점 역할을 할 수 있다. 3D 스캐닝과 디지털 아카이빙 기술의 발전도 출판 과정을 가속할 수 있는 요인이다. 과거에는 점토판을 물리적으로 조사해야만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었지만, 고해상도 스캔 데이터를 원격으로 공유하면 전 세계의 히타이트학 전문가들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나는 디지털 기술이 사피누와에서 겪었던 30년 이상의 출판 지체를 카얄르피나르에서는 상당히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면, 카얄르피나르의 발견은 아나톨리아 전역에 걸친 히타이트 유적 조사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히타이트 제국은 중앙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에게해 연안, 남쪽으로는 시리아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청동기 시대의 대제국이었다. 수도 하투샤 외에도 다수의 지방 행정 중심지, 군사 기지, 종교 거점이 있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튀르키예 정부가 연간 발굴 프로젝트를 2023년 720개에서 2026년 목표 800개로 늘리고 있다는 것은, 이런 미발굴 유적에 손이 닿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카얄르피나르가 보여준 선례, 즉 수도 밖 지방 도시에서도 왕실급 아카이브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유적의 발굴에 대한 기대치를 확실히 높인다. 나는 앞으로 아나톨리아의 여러 히타이트 유적에서 비슷한 규모의 발견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그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대사의 그림은 조금씩 더 풍부해질 것이다.

문화 관광의 측면에서도 장기적 변화가 예상된다. 2025년 튀르키예의 박물관과 유적지를 방문한 사람은 3,480만 명에 달했고, 관련 수입은 73억 TL을 넘었다. 하투샤가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래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는데, 카얄르피나르 같은 새로운 발견은 히타이트 유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보아즈쾨이 점토판이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도 전례가 되는데, 카얄르피나르 아카이브가 충분한 학술적 검증을 거치면 향후 비슷한 국제적 인정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관광 개발과 유적 보존 사이의 균형은 항상 신중해야 할 문제다. 발굴이 진행 중인 유적에 관광객이 몰리면 유적 보존에 위협이 될 수 있고, 관광 인프라 개발이 고고학적 맥락을 훼손할 위험도 있다. 나는 카얄르피나르가 학술 발굴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대중이 접근 가능한 방식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다만 지나친 낙관은 경계해야 한다. 사피누와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990년대 발굴 당시에도 사피누와는 히타이트 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보도되었고, 약 5,000점의 점토판이 나왔다는 소식은 학계의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2014년 기준으로도 전체 아카이브가 미출판 상태였고, 영어로 나온 것은 실용 어휘 목록과 일부 텍스트에 한정되었다. 발굴의 흥분이 학술 출판의 더딘 현실과 만나면, 기대와 실제 성과 사이의 간극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카얄르피나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지금 언론에 보도된 극적인 내용들이 향후 학술 출판 과정에서 수정되거나, 예비 판독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고고학은 흥분과 인내가 동시에 필요한 분야이고, 카얄르피나르도 예외가 아니다.

이 발견에 관심이 생겼다면,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앙카라의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은 히타이트 점토판의 최대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기관이다. 하투샤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어 방문 자체가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고, 보아즈쾨이 점토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히타이트 문명의 세계사적 위상을 보여준다. 온라인에서는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히타이트 텍스트 코퍼스가 학술 자료를 무료로 공개하고 있어, 히타이트 문자와 점복 체계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발견에 대중이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고고학 연구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3,400년 전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도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20년 넘게 묵묵히 흙을 파온 발굴팀과 그들을 뒷받침한 제도적, 재정적 지원의 결과다. 나는 다음 발굴 시즌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사무하의 흙 아래에 아직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지 궁금하다. 점토판 한 장에 담긴 3,400년 전의 한 문장이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다시 쓰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고고학의 매력이고 카얄르피나르가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출처 / 참고 데이터

관련 수다

문화

이름도, 무게도, 장인도 안다 — 근데 만든 연도만 모른다

2023년 11월 나주 금성산에서 군 지뢰 탐지 작업 중 발견된 황자화통(黃字火筒)이 약 3년간의 정밀 조사를 거쳐 2026년 9월 21일 공식 공개되면서 한국 문화유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청동 화기에는 2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감독관(녹사 안휴보), 장인(석), 무게(1근 14량)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제작연도는 60갑자 체계의 한계로 1377년(고려 우왕 3년)인지 1437년(조선 세종 19년)인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현재 제작연대가 확인된 가장 이른 보물급 화약무기인 1555년 천자총통과 비교하면 최소 118년에서 최대 178년을 앞당기는 발견으로, 한국 문화유산 연구의 시간표 자체를 다시 쓸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이 발견은 14세기 또는 15세기 한반도에서 국가 차원의 체계적 생산 시스템이 운영됐음을 명문으로 직접 증명하는 물증으로서, 문헌 기록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실물 차원의 역사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약통 내부의 둥근 형태나 후대 설계 요소의 부재 같은 기술적 단서가 더 이른 시기를 시사하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치는 비교 유물이 극히 부족해 최종 판단이 유보된 상태이다. 이 유물은 단순한 고고학적 발견을 넘어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이며, 6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한국사의 어떤 장면을 다시 열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이 글에서 다룬다.

문화

600년 봉인된 무덤에서 38구가 나왔다 — 근데 여기가 전체의 7%란다

페루 북부 찬찬 유적에서 약 600년간 봉인되어 있던 치무 제국의 엘리트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이는 치무 고고학 역사상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이번 발굴에서 중앙 방의 엘리트 1인을 포함해 총 38구의 유골과 구리 도끼, 진사 안료가 도포된 다수의 유해가 확인되었고, 발굴 책임자 호르헤 메네세스는 이 무덤이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로 약 600년간 봉인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발견이 나온 곳은 전체 면적의 약 7%만 발굴된 찬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가 여전히 땅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치무 문명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의 규모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찬찬은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동시에 위험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엘니뇨 홍수와 도굴이라는 이중 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왔다. 이번 발견은 단순한 고고학적 성과를 넘어, 500년간 식민 약탈과 잉카 중심 서사에 가려져 온 치무 문명의 복원 가능성과 그것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을 동시에 조명하는 사건이다.

문화

'붕괴'가 감춘 것은 마야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었다

멕시코 칼라크물 생물권보전지역 북쪽에서 1,200년 만에 발견된 마야 도시 미난베는 약탈 흔적 없이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제단 여러 기가 의도적으로 훼손된 흔적을 보여준다. 핵심 구역 약 15헥타르에 높이 13m 이상의 피라미드 신전과 석비·제단 14기를 갖춘 이 유적은 터미널 클래식기(CE 800~1000) 마야 도시의 폐기 과정에 대한 새로운 물증을 제공한다. Turner와 Sabloff(PNAS, 2012)는 중앙 마야 저지대의 인구가 90%까지 감소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강한 연속성과 번성이 나타났다고 밝혔으며, 학계 내부에서는 이미 2007년부터 '붕괴'라는 프레임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스미소니언 매거진부터 네이처 뉴스까지 주류 미디어 헤드라인은 2026년에도 '문명 붕괴'라는 단일 프레임에 머물러 있으며, 이 학술-대중 괴리가 미난베 발견을 둘러싼 가장 흥미로운 논점이다. 미난베의 마지막 기년 석비가 849 CE인 반면 석순 가뭄 기록은 871 CE부터 시작된다는 연대 불일치까지 고려하면, 이 발견은 우리가 문명의 종말을 어떻게 서사화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문화

400개를 보고 2만 개라고 했다 — 아마존 300만 문명, 그 숫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2026년 7월 Nature에 발표된 아퀴리 문명 연구는 브라질 아크리주 아마존에서 LiDAR를 이용해 400개 이상의 새로운 지오글리프를 확인하고,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후 850년까지 약 1,450년간 존속한 대규모 문명의 존재를 제시했다. 이 문명의 영역은 약 183,000 km²로 추정되며, 1천년기 초 기준으로 125만에서 300만 명이 거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 인구 추정은 지오글리프 1개당 300명이라는 가정에, 실측된 400개가 아닌 외삽으로 산출한 2만 개 이상의 토루를 곱한 결과이며, 실제 LiDAR 조사 면적은 전체 영역의 약 2.5%인 4,500 km²에 불과하다. 발견 자체는 아마존이 인간이 적극적으로 관리한 경관이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물질적 증거이지만, 보도 과정에서 가정과 불확실성은 탈락하고 숫자만 확정적 사실처럼 유통되는 구조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하이코 프뤼머스는 유적 수가 높은 인구 밀도가 아니라 잦은 이주의 결과일 수 있다고 지적했으며, 연구 주저자 패르시넨 본인도 850년경 문명 붕괴의 원인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 글은 아퀴리 발견의 학술적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숫자가 구성되고 보도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고고학적 발견이 대중 서사로 변환될 때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분석한다.

문화

'화해'라 쓰인 문패 뒤에 승자만 있었다 — D-Day 해변의 UNESCO 등재

2026년 7월 26일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노르망디 D-Day 상륙 해변을 2023년 신설된 '기억의 장소' 범주로 세계유산에 등재했으며, 이는 2006년부터 약 20년간 이어진 교섭의 결실이다. UNESCO는 2018년 제42차 위원회(Decision 42 COM 8B.24)에서 "부정적 기억과 결부된 유산 등재에 대한 유보"를 공식화하며 전장 관련 등재에 사실상 모라토리엄을 걸었으나, 2023년 스스로 '기억의 장소' 범주를 만들어 "화해·성찰·평화적 숙고의 장소"라는 정의와 함께 그 빗장을 풀었다. ICOMOS는 이번 등재를 권고하면서 동시에 관광 압박, 기후변화 및 해수면 상승, 근해 풍력 개발 등 세 가지 위협을 공식 경고했고, 등재를 추진한 노르망디 지역의회 의장 에르베 모랭은 관광객 15% 이상 증가를 전망하고 있어 보존과 관광의 정면 충돌이 예고된다. 이 분석은 UNESCO가 스스로 정의한 "화해"의 기준이 연합군 승전 상륙 작전의 해안을 등재하는 데 충족되는지를 묻고, 히로시마·아우슈비츠 등 기존 전쟁 관련 유산이 "피해자의 서사"로 등재된 반면 D-Day 해변은 "승리자의 서사"로 등재됐다는 제도적 비대칭을 짚는다. 해안 침식 최대 5m/년과 IPCC 최악 시나리오 해수면 +1.8m가 유적의 물리적 생존을 위협하는 가운데, 세계유산 지위가 실질적 보존을 보장하는지 아니면 관광 압박만 키우는지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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