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이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를 지웠다 — 2,500년 된 이름을 삭제할 권리가 박물관에 있는가
한줄 요약
대영박물관이 고대 중동 갤러리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를 조용히 삭제했다. 학술계는 2,500년 이상 사용된 역사 용어의 말소에 반발하고, 2만 명 이상이 복원 청원에 서명했다.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벌어진 이 '라벨 교체'는 단순한 학술적 갱신인가, 아니면 민족 정체성을 지우는 정치적 행위인가.
핵심 포인트
학술적으로 확립된 2,500년의 역사적 용어 삭제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팔라이스티네'로 기록한 이래,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오비디우스 등 수십 명의 고대 학자들이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으로 불렀다. 로마 제국은 2세기에 공식 행정구역명 '시리아 팔라에스티나'를 사용했고, 비잔틴 시대에는 팔라에스티나 프리마, 세쿤다, 살루타리스로 세분화했다.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개방대학교의 고대사 학자들은 '고대 팔레스타인'이 현재 학술 문헌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150년 이상의 학술 전통에 기반한 역사지리학적 사실이다. 한 단어를 지우는 것은 그 단어가 담고 있던 2,500년의 맥락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UKLFI의 로비와 박물관의 '자발적 변경' 주장 사이의 모순
영국의 친이스라엘 법률 단체 UK Lawyers for Israel(UKLFI)은 2026년 2월 6일 대영박물관장 니콜라스 컬리넌에게 서한을 보내 '팔레스타인' 용어의 사용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항의했다. 박물관 측은 라벨 변경이 2025년 초 부서 인사이동에 따른 '정기 갱신'이었으며 UKLFI 서한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The Art Newspaper의 심층 보도에 따르면, 변경 시점과 UKLFI의 캠페인 시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전현직 큐레이터들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박물관이 외부 압력에 의해 변경했다면 학술적 자율성의 포기이고, 자발적으로 변경했다면 왜 학술적 합의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2만 명 이상의 청원과 200명 이상의 문화계 인사 공개 서한
활동가 타그리드 알마웨드가 시작한 Change.org 청원은 하루 만에 6,800명의 서명을 모았고, 3월 중순 기준으로 누적 서명이 2만 명을 넘어섰다. 별도로 브라이언 이노를 포함한 200명 이상의 문화계 저명인사가 대영박물관의 조치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 이 서한은 라벨 변경을 이스라엘 대사관 사적 행사 개최, BP 파트너십 유지와 연결지으며 박물관의 조직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 삭제를 고발했다. 학술적 논쟁이 대중적 문화 저항으로 확산된 것은 이 사안이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정체성과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약탈 기관이 '역사적 정확성'을 운운하는 아이러니
대영박물관은 베닌 브론즈, 파르테논 마블, 로제타 스톤 등 식민지 시대에 약탈한 문화재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으며, '컬렉션의 보전'을 명목으로 반환을 거부해 왔다. 2023년에는 내부 직원에 의해 2,000점 이상이 도난당한 사실이 밝혀져, '가장 안전한 보관자'라는 주장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의 박물관들이 베닌 브론즈를 반환한 와중에도 대영박물관은 British Museum Act를 방패로 반환을 거부했다. 이런 기관이 타 민족의 역사적 명칭을 삭제하면서 '학술적 정확성'을 내세우는 것은 제국주의의 현대적 변주에 다름 아니다.
전쟁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문화적 삭제의 무게
이란 전쟁으로 중동 전역이 불안정한 2026년 2~3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는 시점에서 벌어진 이 라벨 변경은 단순한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다. UNESCO가 이란 내 56개 이상의 박물관과 문화유산이 공습으로 손상되었다고 보고하고, Art Dubai가 전쟁 여파로 20주년 행사를 연기한 같은 시기에, 런던의 박물관이 한 민족의 이름을 조용히 삭제한 것이다. 문화유산이 물리적으로 파괴되는 동시에 언어적으로도 삭제되는 이중적 말소가 벌어지고 있다. 폭탄이 유적을 파괴하는 것과 라벨이 이름을 지우는 것은 스케일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긍정·부정 분석
긍정적 측면
- 학술적 용어의 정기적 갱신은 박물관의 당연한 의무
박물관의 라벨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며,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이나 학술적 합의의 변화에 따라 정기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대영박물관이 '가나안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해당 시대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른 이름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학술적 논거에 기반한다. 고대인들이 스스로를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후대에 부여된 지리적 명칭과 당대의 자기 인식을 구분하는 것은 정당한 학문적 시도이다. 모든 라벨 변경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 역사적 시대착오를 바로잡으려는 시도 자체는 비난할 수 없다
기원전 2000~300년 시대를 다루는 레반트 갤러리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헤로도토스의 첫 기록이 기원전 5세기이므로, 그 이전 시대의 전시물에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부정확성을 내포한다. 고대사에서 현대 국가명이나 민족명을 소급 적용하는 관행은 다른 지역의 전시에서도 논쟁을 일으켜 왔으며, 이를 수정하려는 노력 자체를 정치적 공격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과도한 반응일 수 있다.
- 복수의 역사적 명칭 병기는 방문객 이해도를 높인다
가나안, 이스라엘 왕국, 유다 왕국, 페니키아 등 각 시대와 지역에 맞는 세분화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방문객들에게 더 정확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할 수 있다. 박물관은 '관객 테스트'를 통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가 일부 맥락에서 현대 관객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교육 기관으로서 가능한 한 정확하고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려는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반드시 특정 민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분쟁 지역 용어에 대한 박물관의 신중한 접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처럼 극도로 민감한 지정학적 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박물관이 특정 용어의 사용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어떤 용어를 선택하든 일방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논쟁이 적은 용어(가나안)로 대체하는 것은 박물관의 교육적 기능에 집중하려는 전략일 수 있다. 물론 이 논리에도 결함이 있지만, 박물관이 정치적 전장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우려되는 측면
- 150년간 확립된 학술 용어를 비학술적 근거로 삭제한 것은 역사 수정주의
케임브리지 팔레스타인 연구, 옥스퍼드의 중동 고고학, 세계사 백과사전 모두 '고대 팔레스타인'을 표준 학술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변경의 계기가 된 것이 학술 논문이나 고고학적 발견이 아니라 친이스라엘 법률 단체의 항의 서한이었다는 점은 이것이 학문적 갱신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학술적 합의가 변하지 않았는데 용어를 변경하는 것은 정의상 역사 수정주의이며, 이는 박물관이 스스로 표방하는 '증거 기반 전시'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UKLFI 서한과 변경 시점의 일치는 외부 압력의 강력한 정황 증거
박물관이 '2025년 초 인사이동에 따른 정기 갱신'이라고 주장했지만, UKLFI가 2026년 2월 서한에서 정확히 같은 갤러리의 같은 패널들을 지적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렵다. The Art Newspaper이 취재한 전현직 큐레이터들의 증언에서도 변경 경위에 대한 설명이 엇갈리고 있다. 박물관이 외부 로비에 의해 학술적 판단을 변경했다면,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기관의 자율성이 침해된 심각한 사례이며, 다른 박물관들에 대한 유사한 압박의 선례가 될 수 있다.
- 전쟁 시기에 한 민족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의 상징적 폭력성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지속되고, 이란 전쟁으로 중동 문화유산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2026년에 세계 최대 박물관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삭제한 것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강력한 상징적 메시지를 발신한다. 이름의 삭제는 존재의 삭제와 연결되며, 이것은 문화적 제노사이드의 메커니즘 중 하나다. 유엔 원주민 권리 선언이 문화적 정체성의 보존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21세기에, 세계 최대 박물관이 특정 민족의 역사적 명칭을 삭제하는 것은 단순한 라벨 교체가 아니다.
- 제국주의 약탈 기관이 피식민 민족의 역사 용어를 삭제하는 구조적 아이러니
대영박물관 소장품의 상당수는 대영제국 식민 시대에 약탈, 강탈, 불공정 거래를 통해 획득되었다. 파르테논 마블, 베닌 브론즈, 로제타 스톤이 그 대표적 사례이며, 원산지 국가들의 반환 요청을 British Museum Act를 방패로 거부해 왔다. 이런 기관이 레반트 갤러리에서 피식민 민족의 역사적 명칭을 삭제하면서 '학술적 정확성'을 주장하는 것은, 약탈자가 피해자의 이름을 지우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 선택적 '시대착오 교정'이 드러내는 이중 잣대
대영박물관이 '시대착오'를 문제 삼는다면, 왜 '팔레스타인'만 삭제하고 다른 지역의 현대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가. 이집트 갤러리의 '이집트'는 그리스어 '아이깁토스'에서 유래한 후대 명칭이며, 메소포타미아 갤러리의 '이라크'도 마찬가지다. 유럽 갤러리에서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현대 국명을 고대 유물에 적용하는 것도 동일한 시대착오인데, 이것들은 문제 삼지 않는다. 오직 '팔레스타인'만 선택적으로 삭제한 것은 학술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전망
대영박물관의 '팔레스타인' 명칭 삭제는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전 세계 문화 기관들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의 시작점이다.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 단기, 중기, 장기 시간축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향후 1개월에서 6개월 사이, 이 논란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Change.org 청원이 2만 명을 넘어서고, 브라이언 이노를 포함한 200명 이상의 문화계 인사가 공개 서한에 서명한 상황에서, 대영박물관에 대한 압력은 줄어들기보다 커질 것이다. 영국 의회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노동당 정부 하에서 문화유산 정책에 대한 재검토 논의가 촉발될 수 있다. 동시에 UKLFI를 비롯한 친이스라엘 단체들은 다른 박물관과 대학의 '팔레스타인' 관련 표기에도 유사한 캠페인을 전개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DEI 정책 폐지와 연동하여 박물관 전시 내용에 대한 정부 개입이 강화되고 있으며, 미국 박물관연합(AAM) 조사에 따르면 3분의 1의 박물관이 이미 연방 자금 삭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중동 관련 전시와 학술 행사에 대한 정치적 압력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Art Dubai의 연기가 보여주듯 걸프 지역의 문화 인프라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6개월에서 2년 사이의 중기적 관점에서, 이 사건은 '박물관 용어 전쟁'의 글로벌 선례로 자리잡을 것이다. 대영박물관이 외부 압력에 의해 학술 용어를 변경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전 세계의 정치 단체, 로비 그룹, 정부가 유사한 전술을 모방할 것이다. 중국이 대만 관련 전시 용어에 대해, 터키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표기에 대해, 일본이 '위안부' 관련 표현에 대해 박물관에 압력을 가하는 사례가 이미 존재하지만, 대영박물관의 선례는 이런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AI와 디지털 아카이빙이 확산되면서, 물리적 라벨 변경이 디지털 기록에도 연쇄적으로 적용될 경우 역사 기록의 체계적 왜곡이 가능해진다. 반대 방향에서는 탈식민주의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누가 역사를 쓸 권한이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더 강하게 제기할 것이며, 대영박물관 소장품 반환 논의가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다.
2년에서 5년의 장기적 시야에서, 이 사건은 21세기 박물관의 정체성 자체를 재정의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설립된 '백과사전적 박물관' 모델이 근본적으로 도전받을 것이다. 디지털 복제 기술과 가상 박물관의 발전으로 물리적 소유가 전시의 전제 조건이 아니게 되면, '약탈한 물건을 보관하면서 그 물건의 역사까지 편집하는' 모델은 지속 불가능해진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 대영박물관은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제국주의 유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함께 원산지 커뮤니티와의 협력적 전시 모델을 채택할 수 있다. 중립적 시나리오에서, 박물관은 '팔레스타인' 명칭을 일부 복원하되 '가나안/팔레스타인' 병기 방식으로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에서, 정치적 압력에 의한 역사 서술 변경이 일상화되고, 박물관이 문화 전쟁의 전장으로 전락하며, 학술적 자율성이 체계적으로 침식된다.
더 큰 그림에서 보면, 이 사건은 디지털 시대에 '역사적 진실'이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위키피디아의 편집 전쟁, AI 학습 데이터의 편향, 소셜 미디어의 허위 정보 확산과 마찬가지로, 박물관 라벨의 변경도 '공인된 역사 서술'을 누가 통제하는가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대영박물관의 라벨은 사실상 역사 교과서와 같은 권위를 가지며, 이곳에서 삭제된 이름은 수백만 명의 인식에서도 삭제될 위험이 있다.
나는 이 상황이 문화 기관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한다고 본다. 하나는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여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술적 증거에 기반하여 정치적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역사적 정확성을 지키는 것이다. 대영박물관은 첫 번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며, 그 대가는 2,500년의 역사적 명칭과 함께 박물관이라는 기관에 대한 대중의 신뢰까지 지불하게 될 것이다. 박물관은 역사를 보존하는 기관이지, 역사를 편집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출처 / 참고 데이터
- British Museum did not remove Palestine from labels due to pressure campaign, museum sources say — The Art Newspaper
- Row after British Museum removes term Palestine from some displays — Museums Association
- Backlash Erupts After British Museum Removes Palestine — Artnet News
- Erasing history: British Museum criticised for removing references to Palestine — Middle East Eye
- Did the British Museum Remove Palestine From Its Displays? — Hyperallergic
- British Museum Removed the Word Palestinian from Some Displays Amid Pressure from Pro-Israel Group — ARTnews
- Palestine - World History Encyclopedia — World History Encycl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