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우승, 3연속 탈락, 68% 외국인 — 이탈리아 축구를 죽인 세 가지 숫자
한줄 요약
이탈리아가 2026 북미 월드컵 진출마저 실패하며 사상 초유의 3연속 본선 탈락이라는 치욕적 기록을 세웠다. 48팀으로 확대된 대회에서조차 자리를 잡지 못한 4회 우승국의 추락은 보너스 스캔들, 세리에A의 구조적 병폐, 협회 지도부 총사임이라는 복합적 위기가 동시에 폭발한 결과다. 2006년 베를린의 영광에서 2026년 보스니아 원정의 굴욕까지, 20년에 걸친 아쭈리의 몰락 궤적은 한 나라의 축구가 어떻게 시스템적으로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핵심 포인트
48팀 확대 시대의 4회 우승국 탈락 — 역사적 치욕
2026 북미 월드컵은 종전 32팀에서 48팀으로 대폭 확대됐고, 유럽 배정만 16자리로 늘어났다. 이런 확대된 판에서 월드컵을 네 번 들어 올린 나라가 본선에 못 갔다는 것은 단순한 실력 부족을 넘어선 구조적 실패를 의미한다. UEFA 소속 55개국 중 조지아, 알바니아, 슬로베니아 같은 축구 소국들도 본선에 진출하는 시대에 이탈리아의 3연속 탈락은 전례 없는 수치다.
한국 축구 팬들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아시아에서도 8.5자리가 배정됐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당당히 본선에 진출하는 와중에 4회 우승국이 탈락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건 불운이나 저주가 아니라, 시스템이 근본부터 무너졌다는 것을 숫자가 냉정하게 증명하는 사례다. FIFA 랭킹이나 역사적 업적과 상관없이, 현재의 경쟁력이 없으면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없다는 현실을 이탈리아가 세 번 연속 확인한 셈이다. 48팀 확대가 가져온 기회의 문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 축구의 추락이 단순한 부진이 아닌 체계적 붕괴임을 웅변한다.
보너스 30만 유로 스캔들 — 문화적 타락의 증거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이 월드컵 본선 진출 시 총 30만 유로(1인당 약 1만 유로)의 보너스를 요구했다는 스캔들은 경기 결과 이상의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단순히 선수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이탈리아 축구 문화 전체의 병폐를 상징한다. 세리에A에서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 리그 생태계, 대표팀을 클럽의 하위 호환으로 취급하는 풍토가 선수들의 태도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대표팀 소집이 영광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월드컵 출전이 자부심이 아니라 협상 카드가 되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수년간 대표팀을 홀대해온 시스템의 산물이다. 한국에서 태극마크의 무게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인데, 이탈리아 축구가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졌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와 코리에레 델라 세라 등 주요 매체가 이 사건을 동시에 보도하면서 이탈리아 축구계는 경기 결과와 별개로 도덕적 파산까지 선고받았다. 이 스캔들은 이탈리아 축구의 문제가 전술이나 선수 수준에 국한되지 않고, 축구를 바라보는 철학과 가치관 자체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의 신호다.
세리에A 외국인 비율 68% — 유스 파이프라인의 고갈
CIES 풋볼 옵저버토리의 2025/26 시즌 분석에 따르면 세리에A의 외국인 선수 비율은 68%로, 분데스리가(59%), 라리가(44%)보다 높은 수치다. 프리미어리그(72%)만이 세리에A보다 높지만, 영국은 4개 홈 네이션으로 대표팀 인재풀이 분산되는 특수성이 있다. 이 말은 세리에A 경기에서 11명 중 약 7명이 외국인이라는 뜻이며, 이탈리아 젊은 선수들이 1군 무대에서 경험을 쌓을 기회가 구조적으로 차단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K리그1의 외국인 비율이 약 25~30%인 것과 비교하면 세리에A의 68%가 얼마나 극단적인 수치인지 체감할 수 있다. 클럽 입장에서는 당장 이기기 위해 실력 있는 외국인을 사는 게 합리적이지만, 국가대표팀의 인재풀은 메말라가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다. 유스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어지면서, 세리에A가 글로벌 인재 시장으로 기능할수록 아쭈리의 미래는 어두워지는 역설적 상황이 고착됐다. 라 스탬파의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선수가 세리에A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32%에 불과하며, 이는 주요 유럽 리그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도부 총사임 — 제도적 리셋인가, 반복적 땜질인가
그라비나 협회장, 부폰 단장, 가투소 감독의 동시 사임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전례가 드문 사건이다. 과거에는 감독만 교체하고 협회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는 식의 땜질이 반복됐는데, 이번에는 지도부 전체가 물러남으로써 백지 상태에서 재건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2018년 1차 탈락 당시에는 벤투라 감독만 경질되고 타베키오 협회장이 사임했지만, 실질적 구조 개혁 없이 만치니라는 명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 동시 사임이 진정한 시스템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느냐다. 이탈리아 축구계에는 감독이 바뀌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명장 의존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만치니 이후 스팔레티, 스팔레티 이후 가투소까지 8년간 네 명의 감독을 거치면서도 유스 인프라나 리그 구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병폐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차기 지도부가 인물 교체를 넘어 구조적 개혁에 나설 수 있을지가 이탈리아 축구의 운명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FIGC는 향후 수개월 내에 새 지도부를 구성할 계획이며, 이 과정에서 개혁 의제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되느냐가 관건이다.
2006~2026, 20년 추락 궤적 — 이탈리아 축구 정체성의 상실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은 카나바로, 부폰, 피를로, 가투소, 토티, 델 피에로 같은 전설적 세대의 집합적 역량으로 달성됐다. 그러나 그 세대 이후 이탈리아는 필적할 만한 차세대를 키워내지 못했다. 스페인이 사비-이니에스타 이후 페드리와 가비를 길러냈고, 프랑스가 음바페-치아마니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유스 파이프라인은 말라버렸다.
여기에 전술적 정체성의 상실까지 겹쳤다. 한때 카테나치오로 세계 축구의 한 축을 이루던 이탈리아 축구는 현대 축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만치니 시절 공격적 점유율 축구, 스팔레티의 3-5-2, 가투소의 투지와 피지컬 중심까지 세 감독이 세 가지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것 자체가 합의된 철학의 부재를 증명한다. 한국 축구가 2002년 이후 꾸준히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정체성 없는 축구는 유스 육성의 방향도 잡을 수 없기에,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20년이라는 시간은 한 세대가 통째로 교체될 수 있는 긴 기간이며, 그 사이에 이탈리아 축구는 뚜렷한 비전 없이 표류한 셈이다.
긍정·부정 분석
긍정적 측면
- 지도부 동시 사임으로 인한 제도적 리셋 기회
그라비나 협회장, 부폰 단장, 가투소 감독이 한꺼번에 물러남으로써 이탈리아 축구는 역설적으로 백지 상태에서 재건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얻었다. 과거에는 감독만 바꾸고 협회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는 식의 땜질이 반복됐는데, 이번에는 지도부 전체가 물러난 만큼 근본적인 구조 개혁의 가능성이 열렸다. 독일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이후 비앙카 리겐이 이끄는 개혁 태스크포스를 구성해서 유스 시스템을 재정비한 사례가 참고할 만한 선례다.
이탈리아가 이 방식을 벤치마킹한다면 위기를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다. 특히 세 직위가 동시에 공석이 된 만큼, 서로 다른 인물이 각자의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재건 로드맵 아래 일관된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번 동시 사임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리더십 교체이며, 이를 제도적 리셋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느냐가 향후 10년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 아탈란타 모델의 리그 전체 확산 가능성
이번 탈락으로 이탈리아 축구계 전체에 자기 성찰의 물결이 일고 있고, 세리에A 클럽 구단주들 사이에서도 외국인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탈란타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클럽은 자체 유스 시스템에서 길러낸 선수들을 중심으로 세리에A와 유럽 대회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연간 이적 수익으로 평균 7000만~1억 유로를 올리고 있다.
아탈란타 모델이 리그 전체로 확산된다면 외국인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만큼, 이탈리아 축구의 인재풀은 분명 더 풍부해질 것이다. 트랜스퍼마르크트에 따르면 아탈란타는 유스 선수 매각으로만 누적 5억 유로 이상의 수입을 올렸으며, 이는 대형 구단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을 입증한다. 유스 중심 전략이 경쟁력과 수익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실증적 증거인 셈이다.
- 팬들의 분노가 실질적 개혁 동력으로 작용
이탈리아 축구 팬들은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요구 수준이 높은 팬층 중 하나다. 3연속 탈락에 대한 분노는 SNS와 전통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며, 축구협회에 대한 구체적 개혁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탈리아 최대 스포츠 일간지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팬의 87%가 '감독 교체가 아닌 시스템 전면 개편'을 원한다고 답했으며, 이는 과거 탈락 때와는 확연히 다른 여론 흐름이다.
차기 지도부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강화되면서, 과거처럼 인물만 바꾸고 구조는 방치하는 접근이 통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됐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팬들의 조직적 캠페인은 스폰서와 중계권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런 외부 압력은 정치적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 잠재적 차세대 인재풀의 존재
유스 시스템이 부실하다고 해서 이탈리아의 축구 재능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렐라, 토날리, 냐카 같은 차세대 선수들의 잠재력은 이미 클럽 레벨에서 증명됐다. 바렐라는 인테르에서 세리에A 스쿠데토를 이끈 핵심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토날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 재능을 조직적으로 발굴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는 6000만 인구와 깊은 축구 문화, 100개 이상의 프로 클럽이 존재하며 각 클럽이 유스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시스템을 바로잡으면 결과는 따라올 수 있는 토대가 이미 존재한다. 프랑스가 클레르퐁텐 아카데미 투자 이후 세계 최고의 인재 생산국이 된 것처럼 체계적 투자만 이루어진다면 풍부한 인재풀을 재건할 수 있다.
- 글로벌 축구 개혁의 성공 사례 벤치마킹 가능
독일(2000년 유로 참패 이후 14년에 걸친 유스 개혁으로 2014년 월드컵 우승), 스페인(라마시아 중심 유스 철학으로 2008~2012년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 프랑스(클레르퐁텐 아카데미를 통한 체계적 인재 발굴로 2018 월드컵 우승, 2022 준우승) 등 축구 강국들의 개혁 성공 사례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탈리아는 이미 검증된 모델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이점이다.
일본 축구의 사례도 주목할 만한데, J리그 창설(1993년) 이후 30년간 체계적 유스 투자를 통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과 스페인을 꺾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런 다양한 성공 모델의 존재는 이탈리아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문제는 의지와 실행력이지, 방법의 부재가 아니다.
우려되는 측면
- 인물 교체만 반복하는 구조적 패턴의 지속 위험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2018년 탈락 이후에도 만치니를 영입하여 유로 2020 우승이라는 반짝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인 구조 개혁은 하지 않았다. 만치니가 떠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경험은 명장 한 명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증명했다. 2018년 벤투라 경질 후 만치니, 만치니 사임 후 스팔레티, 스팔레티 해임 후 가투소까지 8년간 4명의 감독을 교체하면서도 유스 인프라나 리그 구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번에도 화려한 감독을 영입하는 것에 집중하고 시스템 구축은 뒷전으로 미루면 4번째 탈락은 시간문제다. FIGC 내부의 정치적 역학도 문제인데, 협회 회장 선거가 클럽 구단주들의 표에 좌우되는 구조에서 구단주들이 원하지 않는 개혁을 밀어붙이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탈리아 축구계의 명장 의존증은 가장 고치기 어려운 문화적 병폐이며, 이 패턴이 깨지지 않는 한 어떤 인사 교체도 무의미하다.
- 세리에A 클럽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개혁 저항
외국인 선수 비율을 규제하자는 논의가 시작됐지만, 클럽 구단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리에A 클럽들은 챔피언스리그 성적이 곧 중계권 수입, 스폰서십, 브랜드 가치로 직결되는 구조에 놓여 있어서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 없이는 유럽 대항전 경쟁이 어렵다. 2024/25 시즌 챔피언스리그 중계권 수입만 해도 세리에A 클럽들에게 약 3억 유로의 수익을 안겨줬으며, 이 수익을 포기할 구단주는 없다.
프리미어리그가 세계 축구 시장의 40% 이상을 장악한 상황에서 세리에A가 외국인 규제를 도입하면 단기적으로 리그 경쟁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현실적이다. 이미 세리에A의 글로벌 중계권 가치는 프리미어리그의 3분의 1 수준까지 하락했고, 여기서 경기력까지 떨어지면 중계권 협상에서 더 불리해질 수 있다. 스페인이나 독일의 50+1 규칙 같은 강력한 거버넌스 장치가 이탈리아에는 부재하여 규제의 실효성 담보가 어렵다.
- 유스 시스템 재건에 최소 10년이라는 시간 소요
지금 당장 유스 아카데미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다고 해도, 그곳에서 자란 선수가 A대표팀에서 핵심 역할을 하려면 최소 8~10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 2030 영국-아일랜드 월드컵과 2034 사우디 월드컵이 다가오는데, 이탈리아 축구계에 그만한 인내심이 있을지 의문이다. 독일도 2000년 개혁을 시작해서 2014년에야 결실을 맺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이탈리아 팬들과 미디어의 단기 성적 압박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가혹한 수준이며, 감독이 3~4경기 연속 무승부만 기록해도 경질론이 터져 나오는 문화에서 유스 중심의 장기 프로젝트는 생존하기 어렵다. 4연속 탈락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개혁 동력 자체가 소멸될 위험도 있다.
- 이탈리아 축구 정체성의 상실과 방향 부재
한때 이탈리아 축구는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견고한 수비와 전술적 영리함으로 세계 축구의 한 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현대 축구에서 이 정체성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 독일의 하이프레싱, 영국의 피지컬 축구 사이에서 이탈리아만의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만치니 시절에는 공격적 점유율 축구를 시도했고, 스팔레티는 3-5-2 전술을 고수했으며, 가투소는 투지와 피지컬 중심으로 돌아가려 했다.
세 감독이 세 가지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것 자체가 합의된 철학의 부재를 증명한다. 정체성의 상실은 단순한 전술적 문제가 아니라 유스 육성의 방향성까지 흔든다. 어떤 축구를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유스 아카데미에 아무리 투자해도 체계적 인재 발굴은 불가능하다. 스페인이 티키타카라는 명확한 철학 아래 미드필더형 인재를 집중 육성한 것과 달리 이탈리아에는 그런 통합적 비전이 전무하다.
- 글로벌 축구 경쟁 환경의 급격한 변화
이탈리아가 재건에 시간을 쏟는 동안 일본, 한국, 모로코, 세네갈 같은 신흥 축구 강국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선수들은 유럽 5대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경험을 축적하고, 자국의 유스 시스템도 빠르게 현대화하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이 독일과 스페인을 꺾고, 모로코가 4강에 오른 것은 세계 축구의 파워 밸런스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8팀 확대 이후 아시아 8.5석, 아프리카 9.5석이 배정되면서 이들 대륙의 축구 수준은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2025년 기준으로 유럽 5대 리그에서 뛰는 일본 선수만 40명이 넘고, 한국도 손흥민을 필두로 20명 이상이 유럽에서 활약 중이다. 이탈리아가 개혁에 실패하면 전통적 강호라는 타이틀은 역사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될 위험이 있다.
전망
당장 몇 달 안에 벌어질 일들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라비나, 부폰, 가투소의 동시 사임은 이탈리아 축구협회(FIGC)에 리더십 공백을 만들었고, 이 자리를 채우는 과정이 이탈리아 축구의 단기적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차기 감독 후보로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루치아노 스팔레티, 안토니오 콘테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핵심은 누구를 앉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권한과 비전을 가진 사람을 앉히느냐다. 만약 다시 한번 "명장 한 명이 다 해결해줄 거야"라는 식의 접근을 한다면, 이탈리아 축구는 같은 실수를 네 번째로 반복하게 된다. 차기 지도부가 감독 선임과 동시에 10년짜리 장기 로드맵을 발표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감독이 바뀌어도 시스템이 유지된다.
2026년 하반기에는 새 감독 체제에서의 첫 번째 시험대가 찾아온다. UEFA 네이션스리그가 바로 그것이다. 네이션스리그는 월드컵이나 유로와 달리 실험의 여지가 있는 대회인데, 새 감독이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새로운 전술적 정체성을 실험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여기서 결과가 좋으면 재건의 신호탄이 되겠지만, 만약 또 부진하면 이탈리아 축구에 대한 비관론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네이션스리그에서 이탈리아가 어떤 축구를 보여주느냐가 향후 2~3년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새 감독이 대담하게 세대교체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본다. 30대 중반의 베테랑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 방정식을 되풀이하는 것이니까.
보너스 스캔들의 후폭풍도 단기적으로 주목해야 할 이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축구 문화의 병폐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는데, 차기 지도부가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리더십의 신뢰도를 결정할 것이다. 선수들에 대한 징계를 넘어서 대표팀 보상 체계 전체를 개편하고, 국가대표 소집에 대한 프로토콜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일 축구협회(DFB)가 2018년 이후 대표팀 운영 문화를 쇄신한 것처럼, FIGC도 "대표팀은 최고의 영예"라는 가치를 선수들에게 다시 각인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중기적으로 보면, 향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세리에A의 외국인 선수 규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현재 68%에 달하는 외국인 비율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한편으로는 국가대표 인재풀을 키우기 위해 자국 선수 출전 기회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리에A의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가 필요하다는 반론이 있다. 스페인 라리가의 모델이 참고할 만하다고 본다. 라리가는 EU 외 선수 등록을 팀당 3명으로 제한하면서도 EU 국적 선수는 자유롭게 영입할 수 있도록 하여, 자국 선수 육성과 리그 경쟁력 사이에서 균형을 찾았다. 세리에A가 비슷한 방식으로 비EU 선수 쿼터를 강화한다면 이탈리아 선수들의 1군 출전 기회가 의미 있게 늘어날 수 있다. 다만 이런 규제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리그 전체의 합의와 UEFA 규정과의 정합성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2027년까지 구체적인 쿼터 개편안이 나올 수 있다고 전망하지만, 클럽들의 저항으로 당초보다 완화된 형태가 될 가능성이 50% 이상이다.
한국 축구 팬의 입장에서 이탈리아의 상황을 바라보면 남다른 감회가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이후 한국 축구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히딩크 이후의 한국 축구가 "히딩크 매직"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돌이켜보면, 이탈리아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은 K리그를 통해 꾸준히 자국 선수를 육성하는 파이프라인을 유지했고, 이것이 손흥민, 김민재 같은 세계적 선수를 배출하는 토대가 됐다. 이탈리아가 벤치마킹해야 할 것은 독일만이 아니라, 리그 규모는 작지만 대표팀 경쟁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한국이나 일본의 모델일 수도 있다.
유스 시스템 개혁도 중기적 관점에서 핵심이다. 이탈리아 축구 유스 아카데미의 문제점은 단순히 투자 부족만이 아니라 육성 철학의 부재에 있다. 스페인의 라마시아, 독일의 DFB 엘리트 유스 프로그램, 프랑스의 클레르퐁텐 같은 체계적 육성 시스템은 기술적 역량뿐 아니라 전술적 사고력까지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데, 이탈리아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국가 단위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 FIGC가 새 유스 육성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각 세리에A 클럽에 유스 투자 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을 도입한다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혁이 결실을 맺으려면 최소 5~7년이 걸린다. 2028년 유로에서 "첫 번째 개혁 세대"가 조금이라도 모습을 드러낸다면 성공의 초기 신호로 볼 수 있겠지만, 완전한 성과는 2030년대 초반에나 기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2~5년 뒤를 내다보면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먼저 낙관적 시나리오, 이른바 bull case부터 이야기하자. 이번 3연속 탈락의 충격이 이탈리아 축구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서, 독일 모델을 벤치마킹한 체계적 개혁이 실행되는 경우다. FIGC가 유스 육성 전담 기구를 신설하고, 세리에A에 자국 선수 쿼터를 도입하며, 대표팀 운영 문화를 완전히 쇄신한다면 이탈리아는 2030 월드컵에서 본선에 복귀할 뿐만 아니라 경쟁력 있는 팀으로 돌아올 수 있다. 독일이 2000년 유로 참패 이후 10년간의 개혁을 거쳐 2014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사례가 이 시나리오의 현실적 근거다. 이 경우 2030년까지 세리에A 외국인 비율은 현재 68%에서 55~58% 수준으로 감소하고, 이탈리아 U-21 대표팀이 유럽 대회에서 4강 이상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있다. 발생 확률은 약 20~25% 정도로 본다.
다음은 기본 시나리오, base case다. 부분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만 근본적인 구조 변화까지는 가지 못하는 경우다. 새 감독이 안정적인 성적을 내고, 일부 유스 프로그램이 도입되며, 외국인 규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지만 클럽들의 반발로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인 시나리오다. 이 경우 이탈리아는 2030 월드컵에는 겨우 진출하지만 16강 수준의 팀에 머무르게 된다. 과거의 "4강 상비군"이라는 위상은 회복하지 못하고, 유럽 축구 2등급 국가(네덜란드, 포르투갈과 비슷한 포지션)로 자리잡는다. 세리에A 외국인 비율은 63~65%로 소폭 감소하는 데 그치고, 근본적 변화보다는 표면적 개선에 머무른다. 이 시나리오의 발생 확률을 약 50~55%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관적 시나리오, bear case다.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인데, 이번에도 인물만 바꾸고 구조는 그대로인 채 시간만 흘러가는 경우다. 새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세리에A 개혁은 클럽들의 반대로 무산되며, 유스 투자도 선언적 수준에 머무른다. 이 경우 이탈리아는 2030 월드컵에서도 4연속 탈락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울 수 있다. 축구 종주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흥 축구 강국들에게 지속적으로 밀리는 상황이 고착화되고, "아쭈리"라는 이름은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는 향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탈리아 축구는 네덜란드가 아닌 터키나 스코틀랜드 수준의 포지션으로 떨어질 수 있다. 발생 확률은 20~25%로 본다.
이 세 시나리오를 관통하는 핵심 변수가 하나 있다. 바로 세리에A의 경제 모델이 변할 수 있느냐다. 프리미어리그가 이미 세계 축구 시장의 40% 이상을 장악한 상황에서 세리에A는 중계권료, 스폰서십, 관중 수입 모두에서 뒤처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규제를 도입하면 단기적으로 리그 수준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고, 이것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자국 선수 육성에 투자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아탈란타 모델이 증명하듯 유스에서 키운 선수를 빅클럽에 높은 이적료로 파는 것이 매번 완성형 외국인을 사는 것보다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아탈란타의 연간 이적 수익은 평균 7000만~1억 유로 수준으로, 이는 리그 중위권 클럽으로서는 놀라운 수치다.
2028~2030년에는 이탈리아 축구의 진짜 정체성 재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카테나치오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이고, 그렇다고 스페인식 티키타카를 따라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이탈리아가 전통적 강점인 전술적 유연성과 수비 조직력을 바탕으로 현대 축구의 고강도 프레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아탈란타의 가스페리니 감독이 보여준 고강도 맨마킹 시스템이 하나의 방향성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축구 문화 자체가 변해야 한다. "결과가 모든 것"이라는 사고방식에서 "과정을 신뢰하자"는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건 세대가 바뀌어야 가능한 변화이기 때문에 5~10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은 이탈리아 축구의 위기가 유럽 축구 전체의 파워 밸런스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탈리아, 독일(2018), 프랑스조차 2022년 타이틀 방어에 실패한 것을 보면, 전통적 강호의 지위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일본, 한국, 모로코, 세네갈 같은 나라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이들의 선수들은 유럽 5대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고 있다. 이탈리아가 재건에 실패하면 이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고, 향후 10년 안에 월드컵에서 유럽 팀이 아닌 아시아나 아프리카 팀이 4강에 진출하는 장면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탈리아 축구의 전망은 시스템적 개혁의 깊이와 속도에 달려 있다. 개혁이 성공하면 2030년대에 부활의 서사를 쓸 수 있지만, 실패하면 영원히 "과거의 강호"로 남을 수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문화적 저력을 믿기 때문에 base case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고,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장기적 투자를 해야 한다. 이탈리아 축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2006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창이 열려 있지만, 그 창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다.
출처 / 참고 데이터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승부차기에서 이탈리아 꺾고 2026 월드컵 진출 — 알자지라
- 이탈리아 선수단, 월드컵 진출 시 1인당 1만 유로 보너스 요구 (라 레푸블리카 인용) — 풋볼 이탈리아
- 유럽 상위 10개 리그의 자국 선수 대 외국인 선수 비율 (2025/26) — 스포팅피디아
- 이탈리아의 3연속 월드컵 탈락, 자업자득이다 — 갭 마르코티 분석 — ESPN
- 이탈리아 축구협회장, 단장 부폰 동시 사임 — 또 다른 월드컵 실패 후 — 워싱턴 포스트
- 유스 선수 매각으로 5억 유로 수입 — 아탈란타가 유럽에서 가장 스마트한 클럽인 이유 — 트랜스퍼마르크트
- 독일의 유로 2000 참패가 어떻게 대대적 구조 개혁을 이끌어냈나 — 포포투(FourFourTwo)
- 이탈리아의 세 번째 대재앙: 월드컵 4회 우승국이 왜 이제 본선에 못 가는가 — 스카이 스포츠
- 라 스탐파: 세리에A에 외국인 경보, 이탈리아 선수 비율 32%에 불과 — 셈프레 밀란 (라 스탐파 인용)
- 2026 FIFA 월드컵 예선 — UEFA 그룹 I (노르웨이, 이탈리아 순위) — 위키피디아